창세기 6장 9절 칼럼 - 함께 걸은 사람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사람들은 흔히 '착하게 살면 손해'라고 말한다. 정직하면 뒤처지고, 원칙을 지키면 외톨이가 되기 쉬운 세상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세상 한가운데서 전혀 다른 길을 걸은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바로 노아다. 홍수 이야기로만 기억하기에는 그의 삶이 던지는 질문이 너무 묵직하다.

본문은 노아를 "의인"이라 부른다. 히브리어로 '짜디크'인데,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은 자리에 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허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또 "완전한 자"로 옮긴 '타밈'은 마음과 삶이 갈라지지 않은 온전함을 가리킨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단어가 "당대"다. 노아는 좋은 시대를 만나서 훌륭했던 것이 아니다. 창세기 6장은 그 시대에 땅이 포악함으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모두가 그렇게 사는 때에 홀로 다르게 산다는 것은 용기를 넘어 고독이다. 그 외로운 시간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의 '히트할레크'는 '걷다'를 뜻하는 동사의 재귀형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계속 걸어갔다는 지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 헬라어 칠십인역은 이를 '유에레스테센',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옮겼다. 노아의 의로움은 이를 악물고 얻은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곁에서 날마다 옮긴 발걸음의 열매였다.

우리도 비슷한 시대를 산다. 비교와 경쟁 속에서 마음은 지치고, 옳은 길이 손해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의지보다 더 가까운 동행이다. 성도의 삶도 그렇다. 거창한 결단보다 하루의 걸음을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방향을 정한다. 출근길과 가정과 일터가 곧 오늘 우리의 노아의 땅이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그 묵묵한 시간이 한 가족을 살렸다. 오늘 우리의 작은 성실과 정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주일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흔들려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다면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 오늘 하루, 그분 곁에서 한 걸음만 더 옮겨 보자.

칼럼에 대한 질문

1. 모두가 한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떤 기준으로 내 길을 정하고 있는가?
2. 나의 겉모습과 속마음 사이에는 얼마나 거리가 있으며, 그 거리를 좁히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3. 오늘 하루 중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시간과 자리는 어디인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창세기 6장 9절 John의 강해 - 의인 노아의 동행

제목: 의인 노아의 동행
구절: 창세기 6장 9절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서론: 홍수 이야기를 떠올리면 방주와 동물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방주를 짓기 전에 한 사람의 삶을 먼저 소개합니다. 온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짧지만 깊게 증언합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리가 어떤 성도로 서야 하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은혜 위에 세워진 삶의 이야기 (9절 상반절)

강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하신 말씀에서 '사적'은 히브리어 톨레도트(תּוֹלְדֹת)로 '내력, 계보, 이야기'를 뜻합니다. 창세기는 이 말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나 8절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선언합니다. 노아의 이름 노아흐(נֹחַ)는 '안식, 위로'라는 뜻을 가집니다.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위로의 길을 여십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그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해설: 요한 웨슬리는 사람이 스스로 선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이 먼저 베푸시는 선행적 은총이 있어야 비로소 선을 향해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노아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도 노아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소개합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자랑할 공로가 아니라 먼저 받은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었습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삶의 이야기는 그 뒤를 따릅니다.

적용: 우리의 신앙 이야기도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오늘 나의 삶의 내력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습니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로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두운 세대 속에서 온전한 사람 (9절 중반절)

강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셨습니다. '의인'은 히브리어 짜딕(צַדִּיק)으로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관계가 바른 사람을 뜻합니다. '완전한 자'는 타밈(תָּמִים)으로 '흠 없는, 온전한, 한결같은'이라는 뜻입니다. 칠십인역 헬라어 성경은 각각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와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완전'은 죄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노아도 훗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9:21)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완전이란 마음이 하나님께 나뉘지 않고 한결같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곧 악이 가득한 그 세대 한가운데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해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죄를 짓지 않는 신비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므로 너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명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노아처럼 한결같은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욥은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고 소개되고,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고 기록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한결같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한결같음을 기뻐하십니다.

예화: 목회 현장에서 만난 한 장면을 나누겠습니다. 한 시골 마을의 작은 가게 주인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저울을 속여 팔던 시절에도, 그분은 늘 덤을 얹어 주며 정직하게 장사하셨습니다. 이웃들은 "그렇게 해서 어떻게 먹고사느냐"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하나님이 내 저울을 보고 계시지 않소" 하며 웃으셨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마을 사람들은 물건을 사러 오기 전에 먼저 그 집사님의 가게를 찾았습니다. 정직한 저울이 가게보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에 신뢰를 심었던 것입니다. 집사님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 온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한결같은 삶은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설교가 됩니다.

적용: 세상이 다 그렇게 한다는 말에 흔들리지 맙시다. 가정과 일터에서 나 한 사람이 정직하고 한결같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를 방주로 쓰십니다. 오늘 한 가지 작은 일에서 온전함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3. 날마다 하나님과 걷는 사람 (9절 하반절)

강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에서 '동행하였다'는 히브리어 히트할레크(הִתְהַלֶּךְ)입니다. 이 동사는 한 번의 걸음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되는 걸음을 나타냅니다. 칠십인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뜻의 유에레스테센(εὐηρέστησεν)으로 옮겼습니다. 동행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해석입니다. 노아의 의로움과 온전함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규칙을 지키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방주를 지으라 명하셨을 때에도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그리하였더라"(6:22)고 기록될 만큼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해설: 동행의 신앙은 성경 전체를 흐릅니다. 에녹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4)고 증언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거든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라고 물으며, 동행에는 뜻의 일치가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라고 가르칩니다. 웨슬리가 강조한 성결의 삶도 결국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며, 그 걸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적용: 하루를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고, 일하는 중에도 "주님, 함께하소서" 하고 고백해 보십시오. 동행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매일 같은 길을 주님과 걷는 일입니다. 오늘부터 하루 한 번, 주님과 함께 걷는 시간을 정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맺는말[Conclusion]:

오늘 우리는 노아의 사적이 은혜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한 사람을 은혜로 붙드셨고, 그 한 사람을 통해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선행적 은총 덕분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온전함은 흠 하나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악한 세대 속에서도 마음이 하나님께 한결같이 향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산다고 말할 때에도, 한결같은 삶 하나가 이웃에게는 방주가 되고 다음 세대에게는 소망이 됩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가 지키는 작은 정직과 신실이 바로 그 방주의 첫 못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의 비결은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며, 마침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도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걸음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이 시대를 살리는 은혜의 길이 될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은혜로 우리를 먼저 찾아 주신 하나님, 노아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정직과 순종으로 우리의 가정과 일터를 지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는 지금 어떤 일을 "세상이 다 그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노아의 '완전'과 완벽주의는 어떻게 다르며,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은 삶을 어떤 모습으로 이어 가고 있습니까?
3. 하루 중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가장 잘 느끼는 시간은 언제이며, 그 시간을 더 늘리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창세기 6장 9절 John의 묵상 -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창세기 6장 9절은 온 땅이 포악과 부패로 가득하던 때, 홍수 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노아라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는 단순한 가계 기록이 아닙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신실한 삶을 주목하고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본문은 노아를 "의인"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어 '차디크'(צַדִּיק)는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바른 관계 가운데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노아는 허물이 전혀 없어서 의인이라 불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었기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또한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완전한'에 해당하는 '타밈'(תָמִים)은 흠 없이 온전하며 마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당대에', 곧 '베도로타브'(בְּדֹרֹתָיו)라는 말은 그가 악한 시대를 피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 한복판에서 온전했음을 보여 줍니다. 웨슬리가 가르친 온전함도 죄가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본문의 절정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입니다. 히브리어 '히트할레크'(הִתְהַלֶּךְ)는 계속해서 함께 걷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칠십인역은 이를 '유에레스테센'(εὐηρέστησεν),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옮겼습니다. 동행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 내딛는 걸음이며, 그 걸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이 동행은 노아의 의지만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손을 내미셨기에 노아가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가 강조한 선행적 은총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고 계셨고, 성도의 믿음과 순종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오늘 우리도 노아처럼 세속의 물결 한가운데 살아갑니다. 환경을 탓하기보다 오늘 하루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일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말씀대로 작은 순종을 쌓아 가는 그 걸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내가 살아가는 일터와 가정에서 "당대에 온전한 자"로 서려면 오늘 어떤 선택이 필요합니까?
2.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나의 하루 일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3.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찾아오신 선행적 은총을 언제 경험했습니까?

기도합시다:

주님,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노아처럼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성도 되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은혜를 기억하며 작은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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