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짐을 하나씩 지고 산다. 갚지 못한 빚, 풀리지 않은 관계, 지난날의 후회, 끝내 말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그런 짐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밤이 되면 그 무게가 어깨를 누른다. 누군가 이 짐을 대신 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믿음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에게 있다.
요한복음 1장은 그런 우리 앞에 한 분을 세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당시 유대 사람에게 어린 양은 제사에 바쳐지던 짐승이었다. 요한은 이분이 우리 대신 값을 치르실 분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어느 한 민족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죄를 두고 한 말이다.
여기서 '지고 가는'은 헬라어로 아이로(αἴρων, 아이론)인데, 짊어진다는 뜻과 치워 버린다는 뜻을 함께 품고 있다. 그러니 어린 양은 짐을 잠깐 거들어 주는 분이 아니라 아예 걷어 가시는 분이다. '어린 양'은 암노스(ἀμνός, 암노스)다. 값없는 위로가 아니라 실제로 대가를 치르시겠다는 약속이 이 단어에 담겨 있다.
요한의 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많은 사람이 따르던 인물이었지만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사람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물렀더라"는 장면을 보고서야 확신한다. '머물다'는 메노(μένω, 메노)에서 온 말로 잠시 스쳐 가지 않고 계속 거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번개처럼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동행이다.
목회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면 무너지는 때는 짐이 무거울 때보다 그 짐을 혼자 지고 있다고 느낄 때다. 병상 곁에서도, 장례를 치르는 자리에서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대단한 해법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존재다. 성도가 예배당에 모이는 까닭도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 짐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요한이 가리킨 어린 양은 그 짐의 주소를 정확히 아시는 분이다.
요한은 끝으로 "내가 보았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라고 말한다. 그는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이 아니라 본 것을 전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가 열려 있다. 혼자 버티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 신앙의 시작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 한 번의 바라봄이다. 누가 내 짐을 질까 하는 오랜 물음에 성경은 이미 대답하고 있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지금 내가 혼자서만 지고 있다고 느끼는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2. 세례 요한처럼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누군가를 가리켜 주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3. 짐을 '나눠 드는' 것과 '걷어 가는' 것의 차이는 내 삶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서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풀리지 않는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요단강 가의 요한은 사람들에게 해결의 방법을 말하지 않고 한 분을 가리켰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죄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다고 선포합니다. 이 복된 증언 앞에 함께 서 보겠습니다. 그 한 분이 누구이시며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지 은혜롭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1.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29절)
강해: 이튿날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어린 양'은 헬라어로 암노스(ἀμνός)이며, '지고 가는'은 아이론(αἴρων)으로 '들어 올려 가져가 없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못 본 척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짊어지고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해설: 이 어린 양은 구약이 기다리던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고백했고(창 22:8), 출애굽의 밤에는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는 약속대로 어린 양의 피가 생명을 살렸습니다(출 12:13). 이사야가 본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쎄, שֶׂה)도 이분이십니다(사 53:7). 웨슬리는 '세상'을 온 인류로 이해했습니다.
적용: 죄책감을 홀로 끌어안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오늘도 그분 앞에 모든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용서받은 성도는 정죄감에서 벗어나 감사함으로 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사람이 됩니다. 숨기고 싶은 허물이 있다면 이번 주 안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아뢰십시오. 십자가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2.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인 증인(30-31절)
강해: 요한은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으니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말합니다(30절). 헬라어 프로토스 무 엔(πρῶτός μου ἦν)은 '나보다 먼저 계셨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영원부터 계신 분임을 밝힙니다. 또 요한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겸손히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말합니다(31절).
해설: 골로새서는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말씀합니다(골 1:17). 요한은 훗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요 3:30). 그가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자기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고 알려 주신 은혜로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웨슬리가 강조한 선행적 은총이며, 우리가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음을 보여 줍니다.
예화: 어느 작은 시골 교회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동안 새벽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난로를 피우던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공로패를 드리려 하자 그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습니다. "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달을 보셔야지요." 세월이 흘러 그분이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예배당은 낯선 얼굴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처음 교회 문을 열던 날, 이분이 건넨 따뜻한 인사가 저를 주님께 이끌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평생 단 한 번도 강단에 서지 않았지만, 그분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 많은 영혼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름은 남지 않았으나 그것이 참된 증인의 모습입니다.
적용: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보다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번 한 주, 가정과 일터에서 말과 삶으로 누군가에게 주님을 소개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증인의 사명입니다. 작은 친절 하나도 주님을 가리키는 귀한 증언이 됩니다.
3.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32-34절)
강해: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고 증언합니다(32절). '머물렀다'는 헬라어 에메이넨(ἔμεινεν)으로, 잠시 스쳐 가지 않고 계속 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고(33절),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고 선포합니다(34절).
적용: 우리의 힘만으로는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뿐 아니라 삶으로 증언합니다. 오늘부터 말씀 앞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루를 여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낙심은 소망으로 바뀝니다. 지금 구하십시오.
맺는말[Conclusion]: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34절을 통하여 세 가지 은혜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절망할 때에도 주님은 이미 그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사슬에 매여 낙심하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 높이는 참된 증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드러나기보다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히 주님을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은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이 한 주도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높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용서받고 성령으로 새로워진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치는 증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오늘도 우리 삶 위에 성령으로 머물러 주실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의 삶은 변화와 열매로 드러납니다. 이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님,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감사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요한처럼 낮아지고 주님만 높이는 증인이 되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 되기를 간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내가 홀로 끌어안고 있는 죄의 짐은 무엇이며,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2. 나는 가정과 일터에서 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가리키는 사람입니까? 3.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성령 충만을 위해 오늘 무엇을 시작하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튿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가리킨 이 한마디가 우리 신앙을 바로 세우는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헬라어로 암노스(ἀμνός)이며, '지고 가다'는 아이론(αἴρων)으로 '들어 올리다, 제거하다'라는 뜻을 함께 지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곁에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짊어지고 가져가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 양과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이 이 한 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웨슬리는 이 말씀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일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므로 누구도 복음의 초청 밖에 있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내 죄가 너무 크다고 낙심하는 성도에게 이 말씀은 큰 위로가 됩니다.
요한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두 번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계시에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총명이나 경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 알게 되는 은혜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아는 것을 자랑하기보다 겸손히 배우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셨다고 증언합니다. '머물다'는 헬라어 메노(μένω)로, 잠시 스쳐 가지 않고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니, 성도는 죄 사함에서 멈추지 않고 성령으로 새로워져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웨슬리가 강조한 성령의 증거와 성화의 삶이 여기에 맞닿아 있습니다.
요한은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하였노라"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보고 들은 은혜를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 동안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가리키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세례 요한처럼 나를 드러내기보다 예수님을 가리키며 살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 아직 내려놓지 못한 나의 죄와 짐은 무엇입니까? 3. 죄 사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삶을 위해 이번 주에 실천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합시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 예수님, 저의 죄를 대신 지신 은혜에 감사하며 성령으로 새롭게 하셔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도 나를 높이지 않고 주님만 높이는 성도가 되게 하시고, 보고 들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