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31절 John의 칼럼 - 염려를 비우고 은혜를 채우는 길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 일상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은 본래 생존을 위한 필요를 걱정하는 존재이며,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 역시 하루의 양식이 불안정한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삶의 한복판에서 “염려하지 말라” 명하신다. 영국의 사제였던 존 웨슬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씀은 단순한 마음의 위로가 아니라 ‘성화의 삶으로 초대하는 명령’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만 우리의 마음이 참된 자유와 거룩함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에게 염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믿음을 약하게 하는 영적 짐’이었다. 염려는 하나님이 공급자이심을 잊게 하고, 은혜의 흐름을 막으며,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일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는 성도들이 거룩한 삶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 염려를 벗어던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현재의 은혜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미 아시고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실천적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웨슬리는 ‘행하는 믿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믿음은 마음속 확신만이 아니라, 일상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염려하지 않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오늘의 작은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해야 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내일의 결과를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오늘의 순종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랑과 선행에 헌신할 수 있다. 염려가 줄어들수록 마음은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진 마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움직인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무책임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책임을 다하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다. 웨슬리는 이것을 ‘은혜의 질서’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먼저이고, 그 신뢰 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이다. 결국 염려하지 않는 삶은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나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만큼, 우리는 걱정보다 순종을, 두려움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염려에서 자유케 하시며, 은혜로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신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일상에서 가장 자주 하는 염려가 무엇이며, 그것이 내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2.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고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성실히 행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3. 오늘 내가 내려놓아야 할 염려 한 가지와, 대신 붙잡아야 할 약속 한 가지는 무엇일까?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마태복음 6장 31절 John의 강해 설교 -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

제목: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의 자유
본문: 마태복음 6장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밀려오는 염려의 문제를 매우 깊이 다루어 주십니다. 인간은 삶의 필요 때문에 불안해하며 마음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믿음이 모든 염려를 이기는 길임을 밝히셨습니다. John Wesley 역시 이러한 믿음을 성결한 삶의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1. 염려의 근원을 밝히시는 주님 (31절)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이라 하시며, 단순한 생각 차원이 아닌, 마음을 지배하는 염려의 습관적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Wesley는 염려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그림자라고 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마음을 장악할 때 영적 생명은 위축됩니다.

-관주: 예수님은 앞선 26절에서 하늘의 새를 보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돌보심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공급하시는 섭리를 실제로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4:6-7에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하며, 기도가 염려를 정복하는 능력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아시며 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적용: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위해 수고하지만, 염려에 묶여서는 안 됩니다. 다가오는 미래를 계산하며 불안해하기보다, 오늘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Wesley가 말한 ‘지금 이 순간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2.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신뢰하라 (32절과 연계)

31절과 연결되는 32절에서 주님은 이러한 염려의 삶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삶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우리는 다릅니다. Wesley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자신 있게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관주: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풍요의 선언이 아니라, 목자 되신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절대 신뢰의 표현입니다. 또한 로마서 8:32는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며, 하나님의 공급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보증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적용: 성도는 욕망을 줄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마음의 질서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필요를 구하되, 염려를 내려놓고 아버지의 자비를 기대하십시오.

3.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33절과 연계)

31절의 금지는 33절의 적극적 명령과 이어집니다. 염려를 버리는 비결은 공허한 마음을 만든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우선순위로 삼는 삶입니다. Wesley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란 마음과 행위가 모두 거룩함을 향하도록 재조정되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관주: 골로새서 3:1-2에서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하며,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것이 신자의 삶의 핵심임을 말합니다. 또한 시편 37:5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 반드시 신실한 공급이 주어진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는 결국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하게 되는 삶을 누립니다.

-적용: 우리의 시간, 재정, 계획,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드릴 때 염려는 힘을 잃습니다. 하나님 중심적 삶이 염려를 몰아내는 가장 강력한 영적 질서입니다.

맺는말[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신 이유는 단지 마음의 평안을 위한 권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자녀의 정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우리의 내면에서 새 힘을 일으키면, 삶의 필요가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Wesley는 성결의 삶이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매 순간 그분의 은혜를 바라보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뢰 안에 거할 때, 염려의 굴레는 끊어지고 자유와 평강이 흘러옵니다.

또한 주님은 단지 염려를 버리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염려의 자리를 대체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우선에 둘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마음을 두며, 아버지의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공급과 평강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는 어떤 일상적 염려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는가?

2.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한다는 것을 내 삶의 어떤 영역에서 실천할 수 있는가?

3. 염려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오늘 내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결단은 무엇인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마태복음 6장 31절 John의 말씀 묵상 - 염려를 멈추고 하나님 나라에 머무는 삶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염려를 부추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내일의 불확실성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본능을 거슬러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영국 복음주의 부흥을 향한 여정 속에서 또한 이 말씀과 씨름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염려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내는 실질적인 영적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하나님보다 상황을 크게 보게 하고, 약속보다 현실을 신뢰하게 만들며, 은혜보다 자기보호의 본능을 붙들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존의 문제 -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 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필요가 사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 필요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분이고(마 10:30),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책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존 웨슬리의 표현을 빌리면,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지금 이 순간 순종하며 사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염려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염려는 마음을 현재에서 빼앗아 내일로 끌고 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웨슬리는 설교에서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의 필요를 매일의 은혜로 채우십니다. 그러나 염려는 마치 내일의 짐까지 오늘 짊어지게 하여 우리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라고 초대합니다. 우리의 질문은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누가 나를 먹이시는가?”여야 합니다. “무엇을 입을까?”가 아니라 “누가 나를 입히시는가?”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필요에 앞서 아버지의 마음을 신뢰합니다. 웨슬리는 이런 신뢰를 ‘완전한 사랑을 향한 성화의 길’이라 부르며, 믿는 자가 염려 대신 사랑과 순종의 삶을 선택하는 과정이라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염려가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야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염려를 멈출 때, 우리의 영혼은 다시 하나님의 평안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안에서 걸어가십시오. 염려가 아닌 신뢰, 걱정이 아닌 감사,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의 나라가 우리의 삶 가운데 실현될 것입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내가 가장 자주 품는 염려는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2.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돌보신다는 약속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3. 오늘 내가 ‘염려를 내려놓고 믿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기도합시다:

주님, 염려가 마음을 흔들 때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게 하소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오늘을 은혜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로마서 12장 15절 John의 칼럼 - 함께 기쁨을 나누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은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한 이 권면은 단순한 감정의 동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깊은 사랑의 실천이다. 웨스리는 영국의 작은 모임들에서 성도들에게 “홀리스틱한 사랑”(holy love)을 강조하곤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죄를 멀리하는 거룩함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기쁨 속으로 실제로 걸어 들어가는 사랑을 뜻한다. 바로 그 정신이 이 말씀 안에 담겨 있다.

사람의 감정은 종종 서로 어긋난다. 누군가가 기뻐할 때 우리는 질투가 일어나기도 하고, 누군가가 슬퍼할 때 적당한 말로만 위로하려는 유혹이 찾아온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감정적 편의를 넘어서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으셨음을 기억하며 서로의 마음에 실제로 참여하라고 명한다. 웨슬리 운동의 핵심인 ‘회중적 거룩함’도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혼자만 잘 믿는’ 신앙은 결코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며, 그 사랑은 반드시 다른 이의 삶에 구체적으로 흘러가게 돼 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웃의 성공을 내 성공처럼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은혜의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비교하고 시기하는 존재지만, 은혜는 우리에게 더 큰 시야를 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선한 일과 모든 기쁨이 결국 주님의 영광으로 모인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의 기쁨도 나의 기쁨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의 흐름을 감사함으로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길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일은 더 깊은 헌신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눈물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야 하고,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말없이 곁에 있어야 한다. 웨슬리 사경회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은, 누군가가 죄를 깨닫고 눈물 흘릴 때 다른 이들이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며 그를 붙드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단지 죄책감의 눈물이 아니라, 은혜의 치유가 일어나는 자리를 함께 지켰다. 고통의 자리에서 흘린 눈물은 주께서 가장 가까이 계신 자리이며, 교회는 그곳을 홀로 걷게 두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참된 기쁨과 참된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구현하는 능력이다. 웨슬리 부흥운동이 영국 전역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진리가 삶으로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서로의 기쁨을 함께 높였던 작은 모임들… 그곳에서 성령은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오늘 우리는 많은 관계 속에서 감정적 거리두기를 자연스러움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다시금 서로의 마음 가까이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이웃의 행복에 감사하며, 이웃의 아픔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바로 그 자리가 성령의 은혜가 흐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을 닮아, 기쁨을 나누고 눈물을 함께하는 삶의 길로 용기 있게 걸어가기를 바란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주변 사람들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준 적이 있는가?

2. 누군가의 눈물과 고통 앞에서 내가 도망치지 않고 머물렀던 경험은 있는가?

3. 공동체적 사랑을 살아내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할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로마서 12장 15절 John의 강해 설교 - 성도의 길

제목: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성도의 길
본문: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의 삶이 단순한 개인 경건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사랑과 실제적 헌신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 은혜의 열매를 보여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존 웨슬리는 성화의 길이 곧 사랑의 완성이라고 보았으며, 이 사랑은 반드시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 성도의 기쁨에 동참하라(15절 상)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라고 명령하며, 성도는 다른 사람의 복과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시기와 경쟁이 아닌, 성령 안에서 서로의 은혜를 축복으로 여기는 거룩한 마음입니다.

-관주: 빌립보서 2장 2절은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하며, 공동체의 기쁨 나눔이 성령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보다 예수께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기뻐했는데, 이는 진정한 겸손과 사랑이 타인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게 함을 설명합니다. 이런 영적 태도는 성령이 주시는 내적 자유에서 비롯됩니다.

-적용: 성도는 누군가의 형통을 경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직장·교회에서 다른 이의 기쁨을 축하해 줄 때 성령은 공동체 안에 하나 됨의 능력을 더해 주십니다.

2. 성도의 슬픔에 동행하라(15절 하)

바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명령하여, 고통받는 이의 슬픔을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 깊이 공감하며 실제적인 위로자로 서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닮은 행동입니다.

-관주: 고린도후서 1장 4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구절은 주님이 인류의 아픔에 직접 동참하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눈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은 거룩한 동행입니다.

-적용: 누군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조언이나 판단보다 먼저 필요 한 것은 ‘같이 울어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공감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증을 전하며, 공동체를 더욱 성숙하게 만듭니다.

3. 사랑의 연합을 이루라 –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삶

본문의 명령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된 몸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공동체의 사랑을 완성하는 성화의 길입니다.

-관주: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설명하며, 성도의 연합이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영적 실재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웨슬리가 강조한 ‘연합의 성화’로, 사랑의 실제적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적용: 성도는 예배 공동체에서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돌보고, 기도 제목을 나누며, 삶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할 때 성령의 역사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맺는말[Conclusion]:

본문은 단순한 인간 관계의 미덕을 넘어,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성화의 실질적 열매를 보여줍니다. 즐거움에 동참하고 슬픔에 동행하는 일은 우리 내면의 사랑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존 웨슬리는 신자의 완전함이란 사랑의 온전함이며, 그 사랑은 반드시 ‘관계 속에서 보이는 경건’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의 삶에 무관심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위해 기뻐하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참된 경건의 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랑의 실천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세상은 경쟁과 비교로 피곤하지만, 교회는 서로의 삶을 품고 안아주는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을 함께 짊어진다면, 그 공동체는 성령의 열매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그 안에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제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며, 세상 가운데 참된 위로와 소망의 통로로 서게 될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는 다른 이의 기쁨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2.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향해 먼저 다가가 함께 울어 준 적이 있는가?

3. 우리 공동체는 성령의 사랑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있는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로마서 12장 15절 John의 말씀 묵상 -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랑의 삶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실천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은 단 한 절이지만, 기독교 공동체가 지녀야 할 사랑의 본질을 깊이 드러냅니다. 존 웨슬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구절은 우리가 ‘성화의 여정’에서 반드시 훈련해야 하는 거룩한 사랑의 실천이자, 공동체적 은혜를 경험하는 핵심적인 방식입니다.

웨슬리는 신앙을 결코 개인적 차원에만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독한 성도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공동체적 나눔 속에서 완성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공동체적 성화의 토대를 보여줍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단순한 동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나의 은혜처럼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기나 비교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웃을 통하여 흘러가도 기뻐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웨슬리는 은혜의 기쁨이 공동체를 통해 확장될 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더 크게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사랑은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책임적 사랑입니다. 단순히 말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 그 눈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언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을 실제로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진심으로 동참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이 자기중심적으로 기울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실 때(롬 5:5), 우리는 이웃의 상황을 나의 것처럼 느끼게 되고, 그들의 감정 속으로 기꺼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자리에서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는 서로 연결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고,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합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공동체적 사랑과 돌봄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길 바라는 ‘성화의 부르심’을 다시 듣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성도가, 자기의 감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웃의 삶에 참여하는 복된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닮아가게 하시며, 이 사랑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가 더욱 건강하게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얼마나 진심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2. 오늘 내 주변에서 ‘함께 울어주어야 할 사람’ 혹은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3. 성령께서 내 마음을 더 넓혀 달라고 어떤 부분을 기도해야 할까?

기도합시다:

주님, 제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참된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시편 31편 24절 John의 칼럼 - 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담대함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다윗의 이 짧은 권면은 고난과 불확실성 속에 흔들리는 모든 신자에게 던지는 영적 호소다. 나는 웨슬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신자의 성화의 길은 곧 ‘바람의 방향을 여호와께 두는 삶’과 밀접하다고 이해한다. 인간의 힘으로 담대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 주어지는 내적 은혜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든다.

다윗이 이 시를 기록할 당시 그는 억울함, 고통, 외적 공격, 배신과 같은 현실적 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웨슬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보여준 신앙의 본질을 “은혜로 말미암는 성도의 거룩한 용기”라 표현했을 것이다. 이 용기는 격정적 감정이나 무모한 대담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선하게 일하신다는 확고한 신뢰에서 나온다.

성경은 “여호와를 바라는 자”에게 담대함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라다’라는 히브리어 '카와(qavah)'는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끈을 힘 있게 당기듯 긴장과 기대를 품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웨슬리의 시각에서 이는 곧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마음을 그분께 고정하는 거룩한 훈련”이다. 말씀, 기도, 찬송, 성도의 교제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지속한다. 그리고 그 바라봄이 깊어질수록 마음의 담대함도 함께 자라난다.

여기서 담대함은 단지 감정의 강함이 아니라 ‘의지의 굳셈’을 포함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새롭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담대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며, 동시에 신자가 응답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상황의 위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행동한다. 다윗처럼 “내 times(때)가 주의 손에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혼란 중에도 안정된 용기를 잃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도 다르지 않다. 불안한 미래, 관계의 상처, 신앙의 흔들림, 경제적 압박이 삶을 위협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고요하지만 강력한 명령을 던진다. “강하고 담대하라.” 이 담대함은 소리 높여 외치는 대담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삶을 붙들고 계시다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다. 웨슬리는 이 확신을 “신자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성령의 내적 증거”라 했다.

그러므로 담대함은 상황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솟아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거해주는 분이 아니라, 두려움의 순간에도 믿음으로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넘어질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선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강하고 담대해지라. 담대함은 멀리 있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여호와를 바라본다’는 행위가 실제 일상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가?

2. 다윗이 경험한 담대함과 오늘 우리가 경험해야 할 담대함은 어떤 점에서 동일하며 또 다른가?

3. 웨슬리의 ‘은혜의 수단’ 개념은 신자의 담대함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시편 31편 24절 John의 강해 설교 - 여호와를 바라는 믿음의 담대함

제목: 여호와를 바라는 믿음의 담대함
본문: 시편 31편 24절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다윗이 깊은 고난과 인간적 한계를 느끼던 순간에도 여호와만을 바라는 신앙의 중심을 밝히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웨슬리 역시 성도의 삶이란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데에서 참된 강함과 담대함이 나온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굳세어지는 믿음의 길을 본문은 우리에게 힘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마음(24절 상)

본문은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라고 부르며 성도의 신앙 자세를 규정합니다. ‘바라다’(קָוָה, qavah)는 끈기 있게 기다리며 소망을 붙들다의 의미를 지니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신뢰를 가리킵니다. 웨슬리는 이 기다림을 ‘은혜를 향한 적극적 기대’라 해석하며, 영혼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이 부으시는 힘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관주: 이사야 40:31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기다리는 자에게 실제적 힘으로 임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편 62편에서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라고 고백하며, 소망의 근원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임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기다림을 무기력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와 능력을 신뢰하는 영적 활동으로 묘사합니다.

-적용: 우리의 기도와 삶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신앙의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서두름과 인간적 계산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2. 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강함(24절 중)

“강하고”(חֲזַק, chazaq)는 마음을 굳세게 하다, 안에서부터 강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웨슬리는 이 강함이 인간의 근성에서 나오지 않고 은혜를 붙드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다윗이 수많은 대적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내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견고함이었습니다.

-관주: 여호수아 1:9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동행이 강함의 근원임을 밝힙니다. 에베소서 6:10 또한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하며, 성도의 강함이 주님의 능력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서술합니다. 성경은 강함이란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적용: 우리의 강함은 성취나 성격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붙드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능력을 구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담대함(24절 하)

“담대하라”(אֲמֵץ, amets)는 용기를 가진 마음, 두려움을 밀어내는 의지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웨슬리는 담대함을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흘러나오는 믿음의 용기’로 해석했습니다. 즉, 담대함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데서 피어나는 열매입니다.

-관주: 시편 27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선언하며 담대함의 근거가 하나님 자신임을 설명합니다. 신약에서도 히브리서 13:6은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성도에게 두려움을 넘는 용기를 공급한다고 말합니다.

-적용: 우리의 담대함은 상황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할 때 생깁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결단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맺는말[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31편 24절은 여호와를 바라는 이들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이 겪었던 위기와 고난의 깊이는 우리 인생의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싼 불안과 대적을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소망을 고정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신앙을 “은혜의 능력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으로 표현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안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강함과 담대함은 인간적 의지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어떤 두려움과 상황도 넘어설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에게 힘을 얻으며, 그분 안에서 담대하게 서야 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속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걸어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태도를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2. 내가 의지하고 있는 강함의 근원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3. 두려운 상황에서 담대함을 얻기 위해 어떤 믿음의 결단이 필요한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시편 31편 24절 John의 말씀 묵상 - 여호와를 바라는 담대함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씀은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는 다윗의 권면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에게 단순한 감정의 격려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웨슬리는 언제나 은혜를 사모하며 거룩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성화의 여정’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의 핵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만 우리는 진정 강해지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할 당시 그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깊은 고난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눌리고, 인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새로운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웨슬리가 말한 ‘믿음 안에서의 내적 증거’, 즉 성령께서 마음에 주시는 확신입니다. 참된 강함과 담대함은 인간의 의지와 성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죄뿐이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담대함은 무모한 용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서 나오는 영적 담대함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주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두려움이 통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마음을 굳건히 하며, 믿음 안에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단순한 기다림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시간표를 신뢰하며, 그분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전인적 신앙의 태도입니다. 웨슬리는 항상 “현재의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은 오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의 믿음을 살며, 오늘의 순종을 행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께서 강함을 주시고, 담대함을 더하십니다.

또한 ‘강하고 담대하라’는 명령은 공동체적 명령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너희들아”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믿음 안에서 함께 서야 합니다. 웨슬리의 ‘속회 운동’이 바로 그러한 공동체적 영성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서로의 신앙을 점검하고, 격려하며, 연약한 지체를 붙들고 일으키는 공동체가 있을 때 성도는 더욱 강해지며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은 홀로 선 영웅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혹시 무거움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앞을 가립니까? 미래가 불투명하고, 오늘의 짐이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다윗의 권면을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십시오.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십시오.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 확신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자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가 즐겨 고백했던 말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고백입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최근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가?

2.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 안에 생기는 담대함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3.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담대함’은 무엇인가?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오직 주만 바라보며 강하고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모든 두려움보다 크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믿음 가운데 흔들림 없이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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