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8장 14절 칼럼 - 지혜와 동행의 비밀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성공한 사람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은 흔히 타고난 재능이나 치밀한 전략, 혹은 탁월한 인맥을 그 비결로 꼽는다. 그러나 본문은 다윗의 놀라운 삶을 단 두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지혜로운 행함, 그리고 여호와의 동행이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지혜롭게 행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마스킬'(מַשְׂכִּיל, 사칼의 분사형)이다. '사칼'(שָׂכַל)은 단순한 영리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상황을 바르게 읽고 분별하는 통찰을 가리킨다. 동시에 이 단어는 '형통하다', '번영하다'라는 뜻도 품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의 지혜와 삶의 형통함은 본래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윗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그는 시기심에 불탄 사울 왕의 창을 피해 다니면서도, 원망하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했다. 웨슬리는 인접 구절(12–13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며 내쫓은 것이 오히려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 앞에 더욱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주목한다. 사람의 음모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뒤집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고백은 다윗의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성경은 이 동행을 단순한 심리적 위로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판단의 근거가 되며, 결과를 이끄는 실제적인 능력이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다.

오늘 우리도 어쩌면 다윗처럼 억울한 상황, 이해할 수 없는 장벽,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서 있을지 모른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전략이나 더 강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분별과 그분과의 신실한 동행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오늘 하루를 걸어가라. 환경이 나를 배신해도, 사람이 등을 돌려도, 그 동행은 끊어지지 않는다. 다윗의 형통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그것이 가장 단단한 삶의 기초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그 기준이 세상의 기준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2. 지금 내 삶에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3. 억울하거나 불리한 상황에서 다윗처럼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사무엘상 18장 14절 John의 강해 - 지혜와 동행의 삶

제목: 지혜와 동행의 삶
구절: 사무엘상 18장 14절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서론: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직후 왕궁에 들어갔지만, 곧 사울의 시기와 살해 위협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창이 그를 겨냥하고, 모함과 위기가 사방을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8장 14절은 그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다윗의 비밀을 드러냅니다. "지혜롭게 행함"과 "여호와의 동행" - 이 두 가지가 다윗의 삶을 지탱한 두 기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비결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 안에서 시작됩니다(18:14a)

강해: 히브리어 원문에서 "지혜롭게 행하니라"는 שָׂכַל(사칼, sakal)의 히필형(Hiphil) יַשְׂכִּיל(야스킬, yaskil)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영리함이나 세상적 처세술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어휘 사전은 이를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며 신중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는 것, 그리하여 형통함에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모든 일에"(בְּכׇל־דְּרָכָיו, 베콜 데라카이우)라는 표현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다윗의 일상 전체가 이 지혜로 물들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해설: 시편 101편 2절에서 다윗은 "내가 완전한 길을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시편의 서약이 사무엘상 18장 14절의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지혜는 기도에서 시작되어 삶 전체로 흘러나왔습니다. 잠언 3장 5-6절 역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가르칩니다. 다윗의 지혜는 자신의 총명이나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말씀을 향한 묵상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삶에서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경험과 교육, 인맥과 정보에서 지혜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1장 5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아 "오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윗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의 눈으로 먼저 바라보는 삶을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의 동행이 지혜를 완성합니다(18:14b)

강해: 본문 후반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문장은 단순한 부연 설명이 아니라 14절 전체의 핵심이자 신학적 결론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יְהוָ֖ה עִמּֽוֹ(여호와 임모, YHWH 'immo)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가 그와 함께"라는 의미로, 이는 아브라함(창 21:22), 요셉(창 39:2, 3, 21), 여호수아(수 1:9) 에게 사용된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를 나타내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 안에 실제로 역사하고 계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해설: 동일한 표현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가 사무엘상 16장 18절에서 다윗을 처음 소개할 때 이미 등장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다윗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흐르는 강줄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동행 없이 어떤 지혜도, 어떤 수고도 생명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화: 1738년 5월 24일 저녁, 존 웨슬리는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소모임에 마지못해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이 낭독되던 중,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조지아 선교지에서 헌신했지만, 늘 무언가 비어 있던 그의 영혼 안에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웨슬리는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분이 내 죄를 없애주셨다는 확신이 내 마음에 주어졌다." 이 순간 이후 웨슬리는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실제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영국 전역을 변화시키는 부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식이 아닌 동행이 역사를 바꾼 것이었습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일해도, 하나님의 동행 없이는 그 수고가 공허할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 1절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시간, 매일 아침 기도로 시작하고, 성경 말씀 안에 거하며, 예배와 성찬, 소모임과 기도라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날마다 여호와와의 동행을 새롭게 하시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3. 지혜와 동행의 삶은 세상 앞에서 살아 있는 증거가 됩니다(18:14)

강해: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자, 바로 이어지는 15-16절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사울조차 그를 두려워하였고, 온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은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코 숨겨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설명 없이도 그 삶에서 무언가 다름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가 한 사람의 삶 안에 나타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해설: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15-16절도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합니다. 다윗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지혜롭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진정 지혜롭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행함이 지혜롭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질 때, 그것이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됩니다. 말로 전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삶이 다윗처럼 "지혜롭게 행하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삶 자체가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설교입니다.

맺는말[Conclusion]:

다윗의 이야기는 성공한 한 영웅의 전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울의 창이 날아오고 모함이 가득한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혜롭게 행한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아갔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신앙의 증언입니다. 위기는 다윗을 꺾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삶과 여호와의 동행은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결정을 내리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갑니다. 이것이 히브리어 שָׂכַל(사칼)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 단순한 영리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뿌리를 둔 통찰력 있는 삶, 그리고 그 삶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형통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성도에게 초청이 있습니다. 다윗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말씀과 기도와 예배라는 은총의 수단을 붙들며, 매일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그 삶 안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처럼 모든 일에 지혜롭게 행하며 주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 안에 거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이 세대를 향한 살아 있는 복음의 증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다윗이 위기 속에서도 지혜롭게 행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나는 오늘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보다 내 판단을 먼저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까?

2.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고백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하기 위해 어떤 은총의 수단(말씀, 기도, 예배, 성찬)을 날마다 사용하고 있습니까?

3. 지혜롭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나의 삶은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는 복음"이 되고 있습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사무엘상 18장 14절 묵상 - 지혜와 동행의 삶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이 짧은 한 절 안에 다윗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동행이 하나로 맞물린 삶입니다. 본문의 히브리어 원문은 이 두 가지를 나란히 기록합니다. "마스킬(מַשְׂכִּיל)" - '지혜롭게 행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로, 단순한 영리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에 맞게 처신하는 깊은 통찰을 의미합니다. 그 옆에는 곧바로 "야훼 임모(יהוה עִמּוֹ)" -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선언이 따라옵니다. 다윗의 지혜와 하나님의 임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마치 두 손이 맞잡은 것처럼 그의 삶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결코 순탄한 환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가 그를 향해 날카롭게 세워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찬사와 함께 창이 날아드는 역설적인 시간 속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다윗의 개인적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비결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험한 착각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웨슬리는 사무엘상 18장 5절의 "지혜롭게 행하니라"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שָׂכַל, 사칼)를 주석하면서,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백성을 섬기는 일 모두에 신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 위에 넘쳤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웨슬리 신학에서 말하는 선행적 은총의 흐름과 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우리가 그 은혜에 응답하여 신실하게 걸어갈 때, 하나님은 더욱 풍성하게 함께하십니다.

성도의 삶에서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영리하게 처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두려움보다 신뢰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위협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어려운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을까'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선언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 진술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려 퍼지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걸음마다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임재를 의식하며 살고 있느냐입니다.

오늘 나의 모든 일 - 가정에서의 관계, 직장에서의 결정,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 - 그 하나하나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지혜를 구하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는 말씀이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혜와 동행, 이 두 가지가 맞물릴 때, 우리의 삶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매일의 결정을 내릴 때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판단을 앞세우고 있습니까?

2. 지금 내 삶에서 사울의 창처럼 느껴지는 두려움이나 위협은 무엇이며, 그 자리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3.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오늘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싶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처럼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고 주님의 동행하심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렵고 복잡한 이 시대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라"는 고백이 오늘 저의 삶 위에 살아 숨 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빌립보서 3장 14절 칼럼 - 푯대를 향해 달리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살다 보면 문득 멈춰 서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겠는 순간, 분주함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드는 날들이 찾아온다. 그런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고백은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말을 건넨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이 한 문장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평생을 통해 검증된 한 인간의 진솔한 삶의 방향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푯대'는 σκοπόν(스코폰)으로 눈을 고정하여 바라보는 목표물을 뜻한다. '달려가노라'는 διώκω(디오코)인데, 단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쫓아가는 전력 질주다. 바울은 자신의 삶 전체를 이 한 동사로 압축했다. 과거에 아무리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어도,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앞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그렇다면 그 목표는 무엇인가? '부름의 상'은 헬라어 βραβεῖον(브라베이온)으로, 고대 그리스 경기에서 승자에게 주어지던 월계관에 해당하는 상이다. 그리고 그 상은 ἄνω κλήσεως(아노 클레세오스), 즉 '위로부터 오는 부르심'에 근거한다. 세상이 주는 트로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수여하시는 영광이다. 우리가 추구할 푯대는 바로 이 위로부터의 부르심이다.

존 웨슬리는 이 구절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얻은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를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가르쳤다.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으로 먼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멈추지 않고 전진하기를 원하신다. 신앙은 결승점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출발선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는 것이다. 바쁘게 달리면서도 엉뚱한 곳을 향해 가고 있다면, 그 수고는 결국 허탈함으로 끝난다. 바울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습니까?" 세상의 인정인가, 물질의 풍요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달음박질은 혼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달리는 공동체가 있고, 위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이끈다. 넘어지고 지쳐도, 다시 눈을 들어 푯대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로, 오늘도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것—그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달음박질이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지금 무엇을 '푯대'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가? 그 목표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2.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했을 때, 내가 내려놓아야 할 '과거'는 무엇인가?

3.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기 위해 나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빌립보서 3장 14절 John의 강해 - 푯대를 향해 달려라

제목: 푯대를 향해 달려라
구절: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서론: 오늘 말씀은 로마의 감옥에서 쓰인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슬에 묶인 채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결코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리고 있었습니다. 목표를 향해, 상을 향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달음박질에 함께 초대받았습니다.

1. 푯대를 분명히 하라 (빌 3:14a)

강해: "푯대를 향하여"라는 말에서 '푯대'는 헬라어로 σκοπόν(스코폰, Strong's G4649)입니다. 이 단어는 '눈으로 주시하는 표적', '시선을 고정하는 목표'를 뜻합니다. 오늘날 영어 단어 'scope(범위, 조준경)'의 어원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고대 경기장에서 경주자는 결승선에 세워진 표적 기둥을 눈에서 한시도 떼지 않고 달렸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 존재가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되어 있음을 이 단어 하나로 표현합니다.

해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너머의 기쁨이라는 '푯대'를 바라보셨습니다. 웨슬리(John Wesley)는 빌립보서 3장을 주해하면서 바울이 추구한 것이 단순한 도덕적 향상이 아니라 '완전한 성화(perfect holiness), 영광을 위한 준비'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즉 성도의 삶은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을 닮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을 닮아갑니다.

적용: 지금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직장의 승진, 자녀의 성공, 건강의 회복이 삶의 전부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푯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푯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우리의 시선을 다시 그 푯대를 향해 맞추십시오.

2. 온 힘을 다해 달려가라 (빌 3:14b)

강해: "달려가노라"는 헬라어 διώκω(디오코, Strong's G1377)입니다. 이 단어는 '추격하다', '전력으로 뒤쫓다'는 뜻으로, 단순히 '걷는다'거나 '나아간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듯, 군사가 적을 추격하듯, 온 몸의 근육을 총동원하여 달리는 이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박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자는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박질하라"고 권면합니다.

해설: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말합니다. 웨슬리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미 달린 경주 구간마저도 잊어버리고, 내 영혼의 온 열정과 힘으로 거룩함과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풀었습니다. 과거의 실패도, 과거의 성공도 모두 내려놓고 오직 앞을 향해 전진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경주입니다. 이 경주에는 게으름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선행적 은총이 우리를 부르셨다면, 그 은총에 응답하는 우리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예화: 1754년, 존 웨슬리는 영국 북부 요크셔의 혹독한 겨울 길을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폭설과 얼음 위에서 말이 쓰러지고, 그의 몸 한쪽은 땅에 끌려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함께 있던 동역자 넬슨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웨슬리는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넬슨 형제, 기운 냅시다. 한쪽 옆구리는 아직 성합니다, 살갗이 벗겨진 건 한쪽뿐이니까요!" 다음 날 아침에도 웨슬리는 일어나 설교했습니다. 상처 입은 몸으로, 그러나 꺾이지 않은 영혼으로. 그는 70대 후반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말씀을 전하며 달렸습니다. 육신은 지쳐도, 그의 영혼의 눈은 오직 하나의 푯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적용: 신앙은 결코 소파에 앉아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행적 은총이 우리를 부르셨지만, 우리는 그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예배를 쉬지 마십시오. 형제자매를 섬기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푯대를 향한 달음박질입니다.

3. 위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라 (빌 3:14c)

강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서 '상'은 헬라어 βραβεῖον(브라베이온, Strong's G1017)입니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심판(βραβευτής, 브라뵤테스)이 승자에게 직접 수여하던 월계관과 상금을 가리킵니다. '위에서(ἄνω, 아노)'는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하늘의 차원', '신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즉 이 상은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상급입니다.

해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바울은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웨슬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를 주석하면서 '모든 선한 것의 창시자요 완성자(the author and finisher of every good thing)'라고 해설했습니다. 우리가 달리는 경주의 출발점도, 결승선도, 상을 주시는 심판자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 안에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적용: 오늘 지쳐 있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삶의 무게에 눌려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달리는 이 경주의 상은 세상의 어떤 트로피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상입니다. 이 상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십시오. 히브리서 12장 1절의 말씀처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여"야 합니다.

맺는말[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 한 절에서 신앙 인생의 전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달리고 있었습니다. 푯대를 향해, 상을 향해, 위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경주입니다. 이 경주에는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혼자 달리는 경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달립니다. 웨슬리가 말한 대로, 그분은 '모든 선한 것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우리가 지칠 때 그분이 붙드시고, 우리가 넘어질 때 그분이 일으키십니다. 선행적 은총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함께 달려가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달라지겠습니까? 푯대를 다시 확인하고, 온 힘으로 달려가며, 위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는 삶, 그 삶이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대하시는 삶입니다. 다시 일어나 달려가십시오.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자주 흔들렸는지 고백합니다.
다시 푯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지치지 않고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의 인생에서 '푯대(σκοπόν)'는 무엇입니까? 지금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점검해 보십시오.

2.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뒤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상을 바라보는 것이 오늘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빌립보서 3장 14절 묵상 - 위를 향한 달음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몸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룬 것에 안주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이 고백은 타협을 거부한 믿음의 선언이며, 성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푯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σκοπόν(스코폰)은 눈을 고정한 표적, 뚜렷한 목표를 뜻합니다. 고대 경기장의 선수가 결승선에 시선을 집중하듯,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 존재를 집중시켰습니다. διώκω(디오코)는 단순한 걸음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한 열정적 추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상'에 해당하는 βραβεῖον(브라베이온)은 고대 경기에서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으로, 하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웨슬리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과거에 달려온 경주까지도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온 영혼의 힘과 열정으로 완전한 성결과 영원한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어제의 성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성화와 더 온전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바울이 추구하는 상은 세상의 명예나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ἄνω κλήσεως(아노 클레세오스) - 위에서 부르신 부름, 곧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완전한 구원과 영생의 상급입니다. 이 상을 향한 달음질은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이끌린 믿음의 응답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셨기에, 우리도 달려갈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유혹이 끊이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 지난 상처, 씻기지 않는 듯한 죄책감이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앞으로 부르십니다.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 삶 - 그것이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과거는 은혜로 덮이고, 미래는 소망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이 짧은 문구가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달음질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웨슬리가 고백했듯,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푯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부터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지금 나의 영적 달음질을 가로막고 있는 '뒤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그것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2. 나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을 얼마나 분명히 인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달려간다는 것이 나의 일상과 선택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와야 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뒤돌아보는 유혹을 이기게 하시고, 위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온 마음 다해 달려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향한 거룩한 달음질을 포기하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날마다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히브리서 10장 24절 칼럼 - 서로를 세우는 사랑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브리서 10장 24절에는 깊이 새겨야 할 헬라어 단어 하나가 숨어 있다. "돌아보아"로 번역된 '카타노에오(κατανοέω, katanoeō, 강: G2657)'는 단순히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기울여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진지하고 세심하게 살피는 행위를 뜻한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오래 눈여겨보듯, 옆에 있는 사람의 삶을 정성껏 들여다보는 것이다. 말씀은 오늘 그 진지한 시선으로 우리를 먼저 부르고 있다.

"격려하며"로 번역된 헬라어 '파로크쉬스모스(παροξυσμός, paroxysmos, 강: G3948)'는 본래 '날카롭게 자극하다'는 뜻을 가진 강렬한 단어다. 이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면 사도행전 15장 39절처럼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다툼'을 가리키지만, 긍정적 맥락에서는 서로를 선한 방향으로 불꽃처럼 자극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의 불씨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불꽃은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에서 타오른다.

18세기 신학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다. 혼자만의 신앙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는 속회(Class Meeting)를 통해 성도들이 매주 서로를 살피고 격려하도록 이끌었다. 웨슬리에게 이 구절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그 자체였다. 함께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신앙의 원리를 그는 삶 전체로 증명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와 이어지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연결은 많아졌으나 진정한 돌봄은 줄어들었다. 군중 속에서도 깊은 고독을 느끼는 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미 오래전에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서로 돌아보라"는 그 외침이 지금 이 시대에 더욱 간절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교회는 단순한 종교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며, 손을 내미는 공동체다. 누군가 지쳐 있을 때 곁에 앉아 주고, 흔들릴 때 붙잡아 주고, 작은 선행 하나로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곳이다. 거창한 것은 필요 없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연대야말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사랑과 선행의 격려이며, 그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

오늘, 당신 곁에 있는 그 사람을 '카타노에오(κατανοέω)' - 깊이, 세심하게 바라보라. 그리고 당신의 말 한마디, 따뜻한 미소, 조용한 배려가 그 사람에게 살아있는 불꽃이 되게 하라. 하나님은 거창한 방법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통해 서로를 세우신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가 된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카타노에오(κατανοέω)' - 세심하고 깊이 바라보고 있는가? 그저 바라보는 것과 진지하게 살피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2.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사랑의 불꽃 '파로크쉬스모스(παροξυσμός)'가 되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를 주는 날카로운 자극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3.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직장, 교회)에서 '서로 돌아보는 문화'를 세우기 위해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작고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히브리서 10장 24절 John의 강해 -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제목: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구절: 히브리서 10장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론: 수많은 성도들이 주일마다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문을 나설 때,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열린 새 길,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선포한 직후, 곧이어 아름다운 명령 하나를 더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이 한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1. 서로를 깊이 살펴보십시오 (히 10:24a)

강해: "서로 돌아보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κατανοῶμεν ἀλλήλους(카타노오멘 알렐루스)입니다. κατανοῶμεν(카타노오멘)은 '카타(κατά, 강조 접두어)'와 '노에오(νοέω, 마음으로 생각하다)'의 합성어로, Strong's G2657에 해당하며, BDAG 사전은 이를 "주의를 집중하여 면밀히 관찰하다(to observe attentively, to fix one's eyes and mind upon)"로 정의합니다. 한 번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 깊이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ἀλλήλους(알렐루스)는 '서로서로'라는 상호적 의미로, 이 명령이 한 방향이 아닌 공동체 전체에게 함께 주어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해설: 히브리서 3:1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동일한 카타노오멘이, 예수님을 향한 시선에서 이제 서로를 향한 시선으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목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0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가르칩니다. 갈라디아서 6:2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명령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운동에서 '클래스 미팅(Class Meeting)'이라는 소그룹을 만들어, 성도들이 매주 서로의 영적 상태를 깊이 살피고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에게 서로를 살피는 것은 하나의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이었습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깊이 살피고 있습니까? 스마트폰으로 서로의 사진을 훑어보는 것이 카타노오멘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옆에 앉은 성도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기도 제목이 있으신가요?"라고 먼저 물어보십시오. 그 작은 한마디가 거룩한 카타노오멘의 시작입니다.

2. 사랑으로 서로를 불타게 하십시오 (히 10:24b)

강해: "격려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παροξυσμόν(파록시스몬, Strong's G3948)입니다. BDAG 사전은 이를 "자극, 격렬한 격려(incitement, stimulation)"로 정의하며, 오늘날 의학 용어 '파록시즘(paroxysm, 발작)'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5:39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심한 다툼"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되었습니다 - 그것은 부정적 격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24에서는 긍정적 방향으로, 사랑과 선행을 향한 강렬한 자극과 격려를 뜻합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신약 번역(1755년)에서 이를 "to provoke one another to love and to good works"로 옮겼습니다 - 서로를 강렬하게 도발하듯 사랑과 선행으로 이끌라는 것입니다.

해설: 요한복음 13:34에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ἀγάπη(아가페)는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와 헌신의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0:22-24의 세 명령 - "담대히 나아가자(v.22)", "소망의 고백을 붙들자(v.23)", "서로를 격려하자(v.24)" - 은 모두 복수 1인칭 '우리가 함께'의 공동체적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할 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연결합니다. 수직적 신앙이 수평적 사랑으로 흘러내릴 때,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예화: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리는 런던 동부 빈민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소외된 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느 혹독한 겨울, 누더기를 걸친 한 노파를 만났을 때 그의 손에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주었다. 다음에는 더 많이 줄 수 있도록 더 검소하게 살겠다." 이 작은 결단이 감리교 공동체가 가난한 자를 함께 돕고 서로를 격려하는 '사회적 성결' 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작은 사랑이 공동체 전체를 파록시스몬 - 사랑의 격발 - 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것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서로를 향한 뜨거운 마음 하나였습니다.

적용: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불씨가 되고 있습니까? 격려 한마디, 진심 어린 기도, 필요한 형제를 위한 작은 손길이 그 사람의 신앙에 거대한 파록시스몬이 될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행하십시오." 당신의 작은 사랑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큰 불꽃이 됩니다.

3. 선행으로 믿음을 증명하십시오 (히 10:24c)

강해: "선행"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καλῶν ἔργων(칼론 에르곤)입니다. καλῶν(칼론, Strong's G2570)은 BDAG 사전에서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고귀한, 훌륭한(morally good, noble, praiseworthy)"으로 정의됩니다. 단순한 '좋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고귀한 행위라는 뜻입니다. ἔργων(에르곤, Strong's G2041)은 '일, 행위, 행실'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가페(사랑)와 칼론 에르곤(선행)을 함께 묶습니다. 이는 내면의 사랑이 반드시 외적 행위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해설: 에베소서 2:10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야고보서 2:17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16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웨슬리의 신학에서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랑과 선행으로 채워지는 실천적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선행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 홀로 사시는 어르신께 전화 한 통을 드리는 것, 힘든 청년에게 커피 한 잔을 사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 이 모든 것이 칼론 에르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이 아름다운 행위를 격려할 때, 진주충만교회는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맺는말[Conclusion]: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0:24를 통해 세 가지 소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카타노오멘 - 서로를 깊이 살피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목하듯 서로를 주목할 때, 공동체는 진정한 돌봄의 공간이 됩니다. 파록시스몬 - 서로를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의 작은 격려가 형제의 가슴에 거대한 불꽃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칼론 에르곤 -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선행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증명됩니다.

히브리서 10:19-24의 큰 흐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로 열린 새 길(v.19-20),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v.22), 소망의 고백을 붙들자(v.23),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자(v.24). 이 모든 명령은 '우리가 함께'의 공동체적 외침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할 뿐 아니라, 서로와도 연결합니다. 수직적 신앙이 수평적 사랑으로 흘러내릴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삶이 되고, 교회는 세상 앞에서 빛을 발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한 분에게라도 먼저 다가가 주십시오. 그 분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기도 제목을 물어봐 주십시오. 작은 격려의 말 한마디를 건네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 이 말씀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말씀이 되기를, 진주충만교회가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격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서로를 깊이 살피고 사랑으로 격려하며 선행으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눈이 열려 형제의 필요를 보고, 우리의 손이 열려 기꺼이 나누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진주충만교회가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빛 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는 평소에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를 카타노오멘 - 마음을 기울여 깊이 살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제목을 물어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2.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사랑의 파록시스몬이 되고 있습니까? 내 말과 행동이 형제를 사랑과 선행으로 타오르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냉담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3. 나의 믿음은 칼론 에르곤 - 선행으로 증명되고 있습니까? 오늘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선행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히브리서 10장 24절 묵상 - 서로를 돌아보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돌아보라"는 말씀은 부드러운 권면처럼 들리지만,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그 깊이가 전혀 다릅니다. '돌아보다'로 번역된 κατανοῶμεν(카타노오멘, Strong's G2657)은 BDAG 사전이 정의하듯 '마음을 집중하여 주의 깊게 살피다'는 강한 능동적 동사입니다. 흘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관찰하고 깊이 헤아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 안의 형제자매를 이처럼 세밀한 눈길로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단어는 εἰς παροξυσμόν(에이스 파록시스몬, Strong's G3948)입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격려하며'로 번역했지만, 원어의 뜻은 훨씬 강렬합니다. '강하게 자극하다', '불꽃을 일으키다'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과 선행의 불씨를 지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서로의 영적 온도를 높이는 거룩한 자리여야 합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739년 찬송과 성시(Hymns and Sacred Poems) 서문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인 종교 외에는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하며, 사회적인 성결 외에는 아무 성결도 알지 못한다(The gospel of Christ knows of no religion but social; no holiness but social holiness)." 히브리서 10장 24절이야말로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 신학의 살아 있는 성경적 뿌리입니다. 홀로 타오르는 불꽃은 쉽게 꺼지지만, 함께 모인 불꽃은 더욱 강하게 타오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조용히 지쳐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 자리에 앉아 있지만 마음의 불씨가 꺼져가는 이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향해 '카타노오멘' -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하십니다. 한 통의 전화, 따뜻한 한 마디, 함께 드리는 짧은 기도가 꺼져가는 신앙의 불꽃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권면이 예배 공동체 안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25절에서 이어서 강조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함께 모여 예배하고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 자체가 서로를 돌아보는 신앙의 실천입니다.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은 언제나 '함께'라는 공간 안에서 역사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잠시 멈추십시오. 내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한 사람이 누구인지 성령님께 여쭤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 사랑과 선행은 위대한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옆에 앉은 성도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지하게 돌아볼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날마다 더욱 아름답게 세워져 갑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지금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주의 깊게(카타노오멘)' 살피고 있습니까, 아니면 형식적인 관심에 머물고 있습니까?

2. 나는 주변 성도들에게 사랑과 선행의 불꽃을 일으키는 '파록시스몬'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불씨를 꺼뜨리는 사람입니까?

3. 웨슬리가 말한 '사회적 성결'을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각자의 삶에 바빠 형제자매를 잊고 살아가는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서로를 주의 깊이 살피며 사랑과 선행의 불꽃을 일으키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를 격려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세워가는 진주충만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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