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 30-31절 John의 강해 - 주가 쓰시겠다

제목: 주가 쓰시겠다
구절: 누가복음 19장 30-31절

"이르시되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니"

서론: 종려주일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십니다. 이 짧은 두 절 속에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우연히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구체적 장소, 구체적 나귀, 구체적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 이 한마디가 오늘 우리 삶의 모든 쓰임의 근거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 자는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습니다.

1. 주님의 명확한 지시

강해: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명하시며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시를 내리십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ὑπάγετε"(휘파게테, 가라)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권위 있는 명령형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항상 이처럼 명확합니다. 막연한 방향이 아니라 "맞은편 마을"이라는 구체적 목적지가 있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모두 이 원칙 위에 섰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권적 인도하심의 본질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계획보다 주님의 지시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 당신에게 주님이 가라 하시는 "맞은편 마을"은 어디입니까? 그 부르심 앞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해설: 이사야 30장 21절은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오직 침묵으로만 계시지 않으시고, 삶의 갈림길에서 구체적인 음성으로 인도하신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잠언 3장 5-6절 역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약속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인정 위에 임합니다.

적용: 오늘 하루, 나의 계획보다 먼저 주님의 뜻을 묻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기도 중에 "주님, 오늘 저를 어디로 보내시겠습니까?"라고 여쭈어 보십시오. 주님의 지시는 때로 낯설고 불편한 방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2. 준비된 나귀와 예비하시는 하나님

강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 이 말씀은 우연이 아닙니다. 헬라어 "πῶλον"(폴론, 나귀 새끼)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는 단어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수백 년 전 선지자의 붓 끝에서 예언된 그 나귀가, 그 날 그 마을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미리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22장 14절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 즉 "주께서 준비하신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이 준비하심은 단지 나귀 한 마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 우리의 사역, 우리의 관계, 우리의 미래 모두를 주님은 이미 예비해 두셨습니다. 성도는 불안 속에서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나귀는 이미 매여 있습니다.

해설: 빌립보서 4장 19절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것으로, 외적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확신했던 신앙 고백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 8절에서 예수님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선행적 은총이 우리의 기도보다 앞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귀한 진리입니다.

적용: 지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나귀를 매어 두신" 분이십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기대하는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3. "주가 쓰시겠다" - 쓰임받는 삶의 신학

강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헬라어 원문에서 "ὁ κύριος αὐτοῦ χρείαν ἔχει"(호 퀴리오스 아우투 크레이안 에케이)는 직역하면 "그 주인이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 이 단 한 마디가 나귀 임자의 모든 의구심을 잠재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선포합니다. 나귀가 쓰임받기 위해 풀려났듯, 우리도 세상의 매임에서 풀려나 주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John Wesley는 평생 이 원칙을 살았습니다. 그는 말과 마차를 타며 영국 전역을 다녔고, 자신의 몸과 재능과 시간을 "주가 쓰시겠다"는 고백 위에 드렸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복된 자리는 주님께 쓰임받는 자리입니다.

해설: 로마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산 제물"은 죽음이 아닌 살아있는 헌신, 곧 일상 속에서 지속되는 순종의 삶을 의미합니다. 나귀 임자가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기꺼이 나귀를 내어준 것처럼, 성도는 자신의 삶 전체를 주님의 뜻에 내어드리는 산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적용: "주가 쓰시겠다" - 이 고백을 오늘 당신의 삶에 적용하십시오. 당신의 시간, 재능, 재물, 관계 앞에 이 고백을 올려드리십시오. 진주충만교회 성도 한 분 한 분이 "주가 쓰시겠다"는 고백으로 드려질 때, 이 교회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발이 될 것입니다.

맺는말[Conclusion]:

예수님은 우연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백 년 전 예언된 나귀, 특정한 마을, 정확한 말씀 -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역사 속에서 정밀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이 한마디 속에 구속사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나귀 임자는 이름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의 순종은 왕의 입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름 없는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 여러분, 당신은 이미 주님께 매여 있는 나귀입니다. 세상은 당신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풀려 하지만, 주님은 "내가 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예배이며, 헌신이며, 진정한 자유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주님의 발걸음을 받들었던 그 나귀처럼,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주님, 오늘 말씀 앞에 선 저희를 "주가 쓰시겠다"는 부르심으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세상의 매임에서 풀려나 온전히 주님의 손에 드려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 관련 질문 3가지:

1. "주가 쓰시겠다"는 고백은 나의 일상적인 결정 - 직업, 시간, 재물 사용 - 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까?

2. 나귀 임자가 즉각적으로 나귀를 내어준 것처럼, 나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예비하심(여호와 이레)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나의 두려움과 불신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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