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2절 John의 말씀 묵상 - 성령을 소멸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헬라어 원문에서 "τὸ πνεῦμα μὴ σβέννυτε"(토 프뉴마 메 스벤뉘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멸하다'를 뜻하는 동사 σβέννυμι(스벤뉘미)는 불을 끄거나 꺼버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役事)를 살아 있는 불꽃에 비유하며, 우리가 그 불꽃을 꺼뜨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뜨거운 임재는 우리의 순종과 사모함으로 더욱 활활 타오릅니다.

20절의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성령의 은사,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단호히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 설교를 통해서든, 권면을 통해서든 -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 앞에 언제나 겸손히 무릎 꿇는 자리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분별한 수용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21절에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합니다. 헬라어 δοκιμάζετε(도키마제테)는 금속을 불로 시험하여 순도를 가리는 행위에서 비롯된 단어로, 분별력 있는 검증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거룩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는 열정과 분별력을 함께 품어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만도, 차가운 이성만도 아닌, 말씀 안에서 균형 잡힌 영적 성숙이 요구됩니다.

22절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에서 '모양'으로 번역된 헬라어 εἶδος(에이도스)는 외형, 형태, 혹은 외양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노골적인 죄악만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처럼 보이는 것, 악의 모습을 띤 것조차 멀리하라는 강력한 권면입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와 글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길이란 죄를 피하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임을 강조했습니다. 악의 어떤 모습도 우리의 삶 속에 발붙일 자리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 네 절의 말씀은 개인의 경건을 넘어 공동체적 영성에 대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자유롭게 흐르기 위해서는 서로를 향한 존중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은사를 시기하거나 억누르거나 냉소하는 문화 속에서 성령의 불꽃은 사그라지게 됩니다. 진주충만교회의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따뜻하고 거룩한 예배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의 삶은 결국 성령의 주도하심에 날마다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입니다. 소멸시키는 삶이 아니라 점화(點火)하는 삶, 멸시하는 삶이 아니라 경청하는 삶, 무분별한 삶이 아니라 분별하는 삶, 타협하는 삶이 아니라 구별된 삶 - 이것이 바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오늘의 우리에게 권면하는 성령 안에서의 온전한 삶의 모습입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일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령의 불꽃을 소멸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순종, 무관심, 바쁨 중에 성령의 음성을 차단하고 있는 영역이 있습니까?

2.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나는 진정으로 경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익숙함과 형식 속에서 그 말씀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3. '악의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 앞에서, 내가 아직 손을 놓지 못하고 있는 '악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합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의 불꽃이 오늘도 꺼지지 않고 환히 타오르게 하옵소서. 말씀을 향한 겸손한 마음과 악을 멀리하는 구별된 삶으로 주님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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