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6편 12절 John의 칼럼 - 은혜에 응답하는 거룩한 보답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면, 시편 기자의 이 질문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성찰의 고백임을 깨닫게 된다. 존 웨슬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질문은 은혜의 능동적 성격을 드러내는 부르심이다. 은혜는 인간의 수고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로 시작되지만,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은혜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우리를 성결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끄는 내적 동력을 만든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행적 은혜’, ‘칭의의 은혜’, ‘성화의 은혜’로 설명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고(선행),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칭의), 마침내 거룩함으로 이끄시는(성화) 전 과정이 모두 은혜로 이루어진다. 시편 기자가 묻는 이 질문은 바로 그 은혜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응답의 언어이다. “주께서 이미 이렇게 행하셨으니, 이제 나는 무엇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이는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반응이며, 강요가 아니라 은혜에 사로잡힌 영혼의 자발적 고백이다.

웨슬리가 강조한 성결의 삶은 곧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성결은 완전함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장, 사랑의 깊어짐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다면, 그 은혜는 반드시 이웃 사랑과 자비, 경건한 습관,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으로 흘러가게 된다. 웨슬리는 이것을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삶”이라 불렀다. 은혜에 대한 참된 보답은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삶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강조한다. 우리가 드리는 것의 본질은 ‘은혜를 갚는다’가 아니라 ‘은혜에 응답한다’에 있다. 하나님은 갚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은혜의 요구는 갚음이 아닌 헌신이다. 은혜를 갚기 위해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이 질문을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건지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며, 발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인생의 여러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신 은혜를 기억할 때, 자연스럽게 이 질문을 하게 된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답은 웨슬리가 강조한 대로, 사랑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다시 서고, 우리의 손이 선한 일을 향해 움직이며, 우리의 발걸음이 이웃을 향해 다가가게 될 때, 그것이 은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보답이 된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2. 은혜에 대한 나의 ‘보답’은 단순한 헌신인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의 반응인가?

3.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나는 무엇인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시편 116편 12절 John의 강해 설교 - 은혜에 응답하는 거룩한 보답

제목: 은혜에 응답하는 거룩한 보답
본문: 시편 116편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기자는 삶의 깊은 고난 속에서 자신을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 앞에서 그는 단순한 감사 이상의, 삶 전체를 드리는 거룩한 결단을 고민합니다. John Wesley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모든 선한 응답을 이끄는 원동력임을 강조하며, 은혜에 대한 성도의 책임 있는 반응을 설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신앙의 본질을 묻고 있습니다.

1. 은혜를 기억하는 신앙 (12절)

시편 기자는 먼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사건과 보호하심,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신 인도하심을 회상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과거의 은혜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포함된 총체적 은혜의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관주: 시편 103편에서 다윗은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권면하며,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며 생명을 구속하시는 구체적 은혜의 내용을 나열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2장은 우리가 허물로 죽었던 자였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다고 설명합니다. Wesley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가 이미 우리의 삶을 붙드시며 믿음의 방향으로 이끄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적용: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구체적 은혜를 기억할 때 올바른 신앙의 방향을 회복합니다.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기억에서 시작하며, 기억은 다시 삶의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2. 은혜에 반응하는 감사의 예배 (12절)

“무엇으로 보답할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예배적 태도의 선언입니다. 시편 전체의 흐름을 보면, 시인은 서원 제사를 드리며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결단을 드러냅니다.

-관주: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하며, 은혜에 대한 최종적 보답을 ‘예배적 삶’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13장은 찬송의 제사와 선행의 제사를 함께 드릴 것을 말하며, 은혜에 대한 감사가 예배와 사랑으로 나타남을 강조합니다.

-적용: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과거의 감사가 아니라 현재의 순종입니다. 예배는 은혜를 되갚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살게 된 자가 마땅히 드리는 존재적 반응입니다.

3. 은혜에 합당한 삶의 헌신 (12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결국 자신의 삶 전부를 드리는 헌신의 길을 선택합니다. ‘보답’이라는 단어는 거래가 아니라 관계 속 헌신을 의미합니다.

-관주: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를 위해 사는 삶으로 부르심을 설명합니다. Wesley는 성화의 길을 ‘은혜에 응답하는 지속적 순종’으로 설명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삶 전체에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봉사, 섬김, 나눔, 순종을 통해 은혜의 흔적을 드러냅니다. 은혜는 우리를 수동적 감사에 머물게 하지 않고, 능동적 헌신으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맺는말[Conclusion]:

시편 기자의 질문은 단순한 신앙적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려는 결단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도저히 스스로 갚을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혜의 크기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향한 능동적 응답을 고민했습니다. Wesley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인간의 모든 선한 행동의 근원이지만, 은혜는 반드시 순종과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로 새롭게 된 사람이며, 은혜의 방향성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결단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은혜가 이미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답을 요구하기보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 예배, 헌신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행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은혜에 대한 사랑의 응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은혜 중심으로 세우고,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에 응답하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설교에 대한 질문:

1. 나는 최근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2. 예배가 은혜에 대한 진실한 감사로 드려지고 있는가?

3. 내 삶의 헌신은 은혜에서 비롯된 순종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시편 116편 12절 John의 말씀 묵상 - 은혜에 대한 응답의 삶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시인의 깊은 감사와 헌신의 고백으로 가득한 시입니다. 이 한 구절은 마치 믿음의 사람들의 심령에서 울려 나오는 찬송 같으며, 은혜의 빚을 느끼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장 진실한 질문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라는 표현 속에는 시인의 지난 생애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질병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셨으며, 그의 발을 넘어지지 않게 붙드셨습니다(시 116:8). 이제 그는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묻습니다. “주여, 이 은혜를 내가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은혜를 체험한 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사랑의 응답입니다. 은혜는 결코 인간의 행위로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려는 헌신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마치 웨슬리가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지만,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선한 행위로 응답한다.” 은혜는 행위를 낳고, 사랑은 헌신을 부른다는 영적 진리를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보답할까(אָשִׁיב(’ā·šîḇ) - 아쉬브) ”라는 단어는 ‘되돌려 드리다’ 혹은 ‘응답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은혜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결코 값으로 갚을 수 없지만,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의 제사로 열매 맺게 합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은혜에 응답합니다.

존 웨슬리 역시 이런 은혜의 응답을 “완전한 사랑의 삶”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성화의 길로 이끌어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대한 참된 보답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그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후 13절에서 그 응답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예배함으로 보답합니다. 이는 단지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 또한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의 잔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은 감사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아무리 헌신하고 봉사한다 해도 그것이 은혜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봉사는 보답이 아니라,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마지못해 헌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감격으로 드립니다. 그 마음은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리던 순간과 같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눅 7:47)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구절의 신약적 해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생명의 호흡, 구원의 은혜, 매일의 공급, 그리고 눈물 속에서도 함께하신 주님의 손길.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질문도 시인과 같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리고 그 답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 내 생명을 드립니다. 나의 시간과 사랑과 헌신을 주님께 드립니다.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에 대한 참된 예배이며, 성결의 삶입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얼마나 자주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2. 내가 드리는 예배와 헌신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응답’으로 드려지고 있는가?

3. 오늘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기도합시다:

은혜의 하나님, 주께서 내 삶에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주님께 응답하게 하소서. 나의 예배와 섬김이 주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되게 하시고, 내 삶이 감사로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마태복음 11장 28절 John의 칼럼 - 참된 쉼의 초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친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적 초대이며, 인간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신 주님의 사랑의 선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생계의 짐, 관계의 짐, 죄책감의 짐, 그리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피로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짐을 벗어놓고 자신에게 나오라고 하신다. 이 초대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 내게로 오라”는 포괄적인 부름이다. 여기서 ‘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John Wesley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참된 쉼이란 단지 육체의 휴식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죄와 율법의 짐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진정한 평안을 누린다고 보았다. 우리의 수고는 죄로부터 비롯된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헛된 노력일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만이 참된 쉼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께서 주시는 쉼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 위안과 다르다. 세상의 평안은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내적 자유이다. Wesley는 이를 “마음이 변화된 자에게 임하는 거룩한 평화”라 표현했다. 그 평화는 회심을 통해 시작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지속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단순히 주님께 위로를 구하는 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주님의 멍에를 배우고 따르는 제자가 될 때, 비로소 지속적인 쉼을 누리게 된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관계의 초대이다. 주님은 피곤한 인생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신다. 자기 중심의 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다. Wesley가 강조했듯, 참된 신앙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단순히 위로받는 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다시금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새 힘을 얻는 은혜의 자리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무겁다면, 주님의 초대를 다시 들어야 한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분의 품 안에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분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있다. Wesley가 말한 “은혜 안에서의 안식”이란 바로 이것이다 - 하나님과 화목한 영혼이 누리는 평화, 그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쉼이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예수께서 말씀하신 ‘쉼’은 단순한 휴식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2. John Wesley가 말한 ‘거룩한 평화’는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드러날 수 있을까?

3. 나는 지금 어떤 짐을 주님께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마태복음 11장 28절 John의 강해 설교 - 짐을 벗고 안식을 얻으라

제목: 수고와 짐, 그리고 그리스도의 안식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보십시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수고하고 있으며, 그 수고는 종종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릅니다. 이 짐은 육신의 피로뿐 아니라, 죄책감의 짐, 세상의 요구에 대한 불안의 짐, 율법적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헛된 노력의 짐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 이 고통스러운 짐 아래 신음하는 영혼들을 향하여 가장 자비롭고 영광스러운 초청을 발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은혜의 복음이자 능력의 복음이며, 우리 영혼의 진정한 안식을 위한 실천적 명령인 것입니다.

1. 짐 진 자들의 실상: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 (마 11:28a)

주님께서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단순히 육체 노동에 지친 이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아래서 죄를 씻기 위해 끊임없이 의무를 이행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오늘날 죄의 권세와 사망의 공포 아래서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 몸부림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지로 애쓸지라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 영적인 짐을 절대로 벗을 수 없습니다. 이 짐은 우리를 짓눌러 영적 기쁨과 평강을 앗아가 버립니다.

-관주: 사도 바울은 이 짐의 실상을 로마서 7장 24절에서 절규하며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의 이 탄식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처절한 증거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짐을 졌음을 깨닫게 하지만, 그 짐을 제거해 줄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의 곤고함과 사망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적용: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짐의 종류를 정직하게 인식하십시오. 혹시 아직도 행위로 의로워지려 노력하는 헛된 수고를 하고 계십니까? 그 짐을 내려놓고, 우리의 의가 되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영적 파산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첫 걸음입니다.

2.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초청: 믿음으로 나아옴 (마 11:28b)

주님께서는 그 짐 진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초청은 보편적 은혜를 선포하는 것으로, 종교적 배경이나 죄의 깊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과 믿음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이 곧 회개와 믿음입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짐을 진 채로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관주: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주님은 이 초청의 무조건성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초청은 후회나 취소가 없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예방적 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인하여 이 초청에 반응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적용: 초청에 응하는 것은 지연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망설이지 마십시오. 우리의 노력과 선행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한 믿음만이 우리를 그분 앞으로 인도합니다. 지금 즉시 그분께 우리의 짐을 맡기기로 결단하십시오.

3. 완전한 안식의 약속: 구원과 성화의 은혜 (마 11:28c)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입니다. 이 안식(ἀναπαύσω, *anapauso*)은 단순히 수고를 멈추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이는 첫째로, 죄 사함으로 인한 양심의 평안 (칭의의 안식)이며, 둘째로,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성화의 시작)입니다. 이 안식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어, 마땅히 져야 할 그리스도의 멍에(v. 29)를 기쁨으로 질 수 있게 합니다. 진정한 안식은 나태함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성화된 삶의 동력이 됩니다.

-관주: 히브리서 4장 9-10절은 이 안식이 종말론적인 차원까지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이 땅에서 믿음의 확신(Assurance)과 성령으로 인한 내적 평화를 통해 시작되어, 천국에서 온전한 사랑(Perfect Love)과 영원한 평강으로 완성됩니다. 이 땅에서의 안식은 곧 성화의 길을 걷는 능력입니다.

-적용: 그리스도의 안식을 얻은 성도는 이제 사랑의 멍에를 지고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쉰다는 것은 죄의 멍에를 벗고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여러분의 삶을 성화로 이끌어 사회적 거룩함(Social Holiness)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맺는말[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청 앞에서 우리의 짐을 다시 한번 재어보아야 합니다. 그 짐은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짐이며, 율법적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교만의 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짐을 아시고, 그분의 온전한 은혜를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이 초청은 역사상 가장 확실하고 자비로운 약속이며, 우리의 영혼과 삶의 방향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칭의의 평안과 성화의 능력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안식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하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겸손과 온유를 배워 세상의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봉사와 정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안식을 미리 맛본 자로서, 우리는 이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짐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안식 가운데 쉬면서 동시에 가장 열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안식을 누리며, 온전한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거룩하고 실천적인 삶을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당신이 현재 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을 통해 내려놓아야 할 가장 큰 영적 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존 웨슬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께 '오라'는 초청에 응답하는 실천적인 믿음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3. 그리스도의 안식을 얻은 후, 우리가 져야 할 '그리스도의 멍에'는 무엇이며,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사회적 거룩함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겠습니까?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마태복음 11장 28절 John의 말씀 묵상 - 참 안식을 주시는 주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수고와 짐의 연속입니다. 육체의 피로뿐 아니라, 마음의 짐과 영혼의 무거움이 우리의 삶을 짓누릅니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이 말씀은 단지 지친 인생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피곤함, 곧 죄와 자기 의, 세상의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참된 초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초청은 모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율법의 무거운 짐 아래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완전함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짐진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곧, 율법의 짐을 벗고 은혜의 품으로 오라는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헬라어로 ‘쉬게 하리라(ἀναπαύσω)’는 단어는 ‘영혼이 회복된다’, ‘안식하게 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휴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회복되는 영적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평화,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쉼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 말씀을 ‘복음의 중심 초청’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진정으로 쉬는 곳은 오직 그리스도의 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의, 업적, 노력으로는 결코 영혼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과 행위의 종교는 우리를 더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는 짐을 내려놓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의 초청은 우리를 죄의 짐에서, 두려움의 속박에서, 자기 의의 굴레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단순히 예배에 참여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신뢰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삶의 중심을 그분께 옮기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강조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바로 이 초청에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쉬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의 은혜 위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제한이 없습니다. ‘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πάντες* (pantes)이며,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지식의 많고 적음, 신앙의 연륜,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피곤한 영혼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그분께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무거운가요? 세상의 요구, 인간관계의 압박, 죄의 유혹 속에서 영혼이 지쳐 있는가요?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 머무르십시오. 그리스도는 여전히 팔을 벌려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이 짐을 감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시는 분이십니다. 참 안식은 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짐을 지는 상태입니다. 그분이 멍에의 반대쪽을 함께 메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영적 혁명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는 부르심이며,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의 회심입니다. 진정한 쉼은 우리가 가진 문제들이 사라질 때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그 모든 짐을 바라볼 때 시작됩니다.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거기서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천국의 평화를 맛볼 것입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내 삶의 어떤 짐을 스스로 지려 하고 있습니까?

2. ‘예수께 나아온다’는 것은 나의 일상에서 어떤 결단을 의미합니까?

3. 주님 안에서 얻는 참된 쉼은 세상이 주는 쉼과 어떻게 다릅니까?

기도합시다:

주님, 제 영혼이 수고와 근심으로 지쳐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짐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골로새서 1장 10절 John의 칼럼 - 주께 합당하게 행하기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주께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삶의 교훈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의 정체성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말씀이다. 인간의 선행이나 도덕으로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이제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다. 존 웨슬리는 이 구절을 ‘성화의 실천적 열매’로 보았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곧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선한 행위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범사에 기쁘시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반에 주권을 가지신다는 고백이다. 예배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과 직업, 인간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웨슬리는 일상 속에서의 거룩을 ‘평범함 안의 경건’이라 불렀다. 그는 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정의 부모, 심지어 세상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로 여겼다. 주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성직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부르심이다.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는 말씀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열매를 의미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사랑과 자비, 인내와 절제가 우리 삶 속에서 맺혀진다. 웨슬리는 믿음과 행위를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이 없는 행위는 헛되며, 행위 없는 믿음 또한 죽은 것”이라 설교하였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단지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구절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를 뜻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랑과 순종을 통해 깊어지는 관계의 성장이다. 웨슬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한 ‘은혜의 수단’ 속에서 이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에게 성장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여정이었다. 믿는 자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더욱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

결국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기쁨을 중심으로 한 삶이며, 선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날마다 성숙해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웨슬리적 신앙의 핵심,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가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는 ‘은혜의 실천’이다. 오늘도 우리 각자가 걷는 자리에서,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의 태도가 주께 합당한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 길 위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실 것이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주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오늘의 직장이나 가정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가?

2.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이 단순한 도덕적 행위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감’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어떤 영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골로새서 1장 10절 John의 강해 설교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삶

제목: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성화의 길
본문: 골로새서 1장 10절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골로새서 1장 10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시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그들이 단순히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삶, 곧 성화의 길을 걸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저 존 웨슬리는 늘 강조해 왔듯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는 성화라는 열매를 맺어야 참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단지 미래의 소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선행 은총으로 시작된 이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여, 세상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도전합니다. 이제 이 귀한 말씀이 제시하는 세 가지 목표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는 삶 (10절 상반절)

바울은 먼저 우리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거룩한 부르심에 걸맞은 행실을 나타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입술로만 주를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범사에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열심입니다.

-관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에베소서 5장 10절은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권면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별 있는 삶을 촉구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너희가 우리에게 배웠으니 더욱 그러한 삶을 힘쓰라"고 명합니다. 이는 곧 주님께 합당한 행실이 우리 삶의 목표이자 지속적인 노력의 대상임을 보여줍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행위를 낳습니다.

-적용: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작은 결정들, 직장에서의 정직함,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심지어 혼자 있을 때의 마음가짐까지도 '과연 이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십시오. 외적인 형식에 갇히지 말고, 마음의 순결함으로 주님을 섬기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생산적인 삶 (10절 중반절)

두 번째 목표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단지 개인의 경건 생활을 넘어,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봉사의 선한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물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약 1:27),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회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해 생산적인 선행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관주: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이 참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가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표지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적용: 여러분의 은사와 재능을 사용하여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십시오. 학교, 일터, 가정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통로가 되십시오. 선한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작은 친절과 봉사가 모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은 나의 교구'라는 정신으로,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는 지속적인 성장 (10절 하반절)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목표를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를 넘어,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성품과 뜻을 경험적으로 깨달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적 지식은 결코 정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와 성례와 같은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려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관주: 호세아 6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하며,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장 18절은 우리에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명하며,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적용: 여러분은 매일 성경 읽기와 기도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실천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한 지적인 탐구와 영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주께 합당하게 행할 능력을 얻게 되고, 선한 열매를 맺을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지성(知性)과 감정(感情), 의지(意志) 모두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맺는말[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골로새서 1장 10절 말씀을 통해 칭의 이후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성화의 삶, 곧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세 가지 핵심 목표를 확인하였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는 삶은 우리의 신앙 인격이 하나님 앞에서 흠 없고 거룩하게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생산적인 삶은 우리의 믿음이 세상 속에서 구체적인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변혁적인 힘을 발휘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는 지속적인 성장은 우리가 평생토록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영적 지식을 심화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 세 가지 목표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핵심 정신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의 모범을 세상에 보이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잠시 머무는 나그네의 여정이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칭의의 기쁨 위에 성화의 집을 굳건히 지어 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 은총을 베푸셔서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이제는 성령의 끊임없는 도우심을 통해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완전한 사랑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바라옵건대, 모든 성도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그 날까지 경건의 열심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성화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아가 이 세상이 복음의 빛으로 밝혀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이 말씀을 마칩니다. 아멘.

설교에 대한 질문:

1.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삶’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일’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 차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2.  우리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개인적인 경건과 사회적인 책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요?

3.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목표를 위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구체적인 은혜의 수단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골로새서 1장 10절 John의 말씀 묵상 -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삶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기도의 중심에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 합당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적 삶의 원리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걸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범사(πᾶσιν - pāsin)’는 모든 영역, 즉 우리의 일상, 직장, 관계, 심지어 고난의 순간까지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일의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월요일의 노동과 가정의 대화 속에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웨슬리 또한 신앙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논할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사랑의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거룩함은 단지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적극적 의지다.” 즉, ‘범사에 기쁘시게 함’은 사랑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는 말씀은 신앙이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요 15:5)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셨습니다. 선한 열매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맺히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자기 의의 표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아는 것(ἐπίγνωσις, epignosis)’은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관계적 지식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더욱 깊어지는 친밀한 앎을 뜻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단순히 교리를 더 아는 데 있지 않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면 우리의 삶도 그분의 뜻에 맞게 변화됩니다. 웨슬리는 이를 ‘은혜 안에서의 성화’라고 표현하며, “지식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순종으로 완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골로새서 1장 10절은 그리스도인의 전인적 성숙을 보여줍니다. 주께 합당한 행위(삶의 방향), 주님을 기쁘시게 함(삶의 동기), 선한 열매(삶의 결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삶의 성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머리의 지식에서 가슴의 사랑으로, 그리고 손과 발의 순종으로 흘러갈 때, 주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모든 행실 속에서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으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나의 일상 속에서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삶’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2. 나의 신앙은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기중심적 열매에 머물러 있는가?

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의 삶의 태도와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의 삶이 주께 합당하게 하시며,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소서. 선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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