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2절 John의 칼럼 - 불을 끄지 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 앞에 선다.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말을 할지.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선택을 이야기한다. 바로 내 안에 타오르는 불, 즉 성령의 불씨를 살릴 것인가, 꺼뜨릴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한 종교적 권고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생명의 경고다.

헬라어 원문에서 '소멸하다'는 단어는 σβέννυτε (스벤뉘테, *sbennyte*)로, 불을 물로 끄는 행위를 뜻한다. 무관심, 냉소, 두려움, 세속적 욕망 - 이것들이 성령의 불을 서서히 꺼뜨리는 물이 된다. 반면 히브리 전통에서 하나님의 영, רוּחַ (루아흐, *rûaḥ*)는 바람처럼, 불처럼 생동하는 존재다.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를 살리고, 깨우고, 방향을 제시한다. 이 살아있는 영을 소멸시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바울은 이어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예언이란 단순히 미래를 점치는 일이 아니다. 헬라어 προφητεία (프로페테이아, *prophēteia*)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행위 전체를 포함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 말씀, 성경 묵상,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진솔한 영적 대화가 모두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때로 이런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흘려듣는다. 그러나 그 말씀 한 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돌이키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구절은 성도에게 분별력을 요청한다. 헬라어 δοκιμάζετε (도키마제테, *dokimazete*)는 금속을 불에 달궈 순도를 검사하는 장인의 행위에서 비롯된 단어다.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모든 것을 의심으로 거부하지도 말고, 진지하게 살피고 검증하여 선한 것을 붙들라는 뜻이다. 이 분별력이야말로 신앙 성숙의 열매이며, 혼란스러운 세상을 지혜롭게 걸어가는 성도의 능력이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마지막 명령은 놀랍도록 현실적이다. 악은 언제나 그럴듯한 모양으로 찾아온다. 작은 타협처럼, 한 번쯤은 괜찮다는 위로처럼, 모두가 다 하는 일처럼 포장되어 온다. 그러나 바울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악의 모양 자체를 멀리하라고 명한다. John Wesley는 이것을 '완전한 성화'의 실천적 표현으로 이해했다. 거룩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서 쌓여가는 삶의 방향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내 안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 들려오는 말씀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 무엇이 선한지 진지하게 헤아리는 것, 그리고 악의 어떤 유혹에도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를 갖는 것 - 이 네 가지의 일상적 실천이 성도의 삶을 빚어간다. 불씨 하나가 들판을 밝히듯, 오늘의 작은 순종이 내일의 풍성한 생명을 준비한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오늘 어떤 방식으로 내 안의 성령의 불을 소멸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2. 내가 공동체 안에서 흘려듣거나 멸시했던 '말씀'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3. '악의 어떤 모양'이라도 버린다는 것은 내 일상의 구체적인 어떤 선택과 연결되는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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