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장 10절 칼럼 - 빈손이 풍요롭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은 언제나 이분법으로 돌아간다. 슬프면 기쁨이 없고, 가난하면 줄 것이 없으며, 빈손이면 가진 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2천 년 전, 지중해를 떠돌며 복음을 전하던 한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은 감옥과 매질과 굶주림 한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한다"고 선언했다. 이 기묘한 역설이 오늘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헬라어 원문은 이 구절을 세 쌍의 대조로 구성한다. 먼저 '근심하는 자'로 번역된 '뤼푸메노이(λυπούμενοι)'는 실제 슬픔과 깊은 고통을 가리킨다. 바울은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동시에 '카이론테스(χαίροντες)', 곧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누렸다. 외면의 고통과 내면의 기쁨이 모순처럼 공존하는 이 역설은, 삶의 깊은 층을 아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두 번째 역설은 더 놀랍다. '가난한 자'로 번역된 '프토코이(πτωχοί)'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극빈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바울은 실제로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플루티존테스(πλουτίζοντες)', 즉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였다. 18세기 신학자 존 웨슬리는 이에 대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라고 주석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복음으로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부자라는 것이다.

세 번째 역설은 절정에 이른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표현에서 '카테콘테스(κατέχοντες)'는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단단히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통째로 붙들고 있는 역설적 소유다. 웨슬리는 이를 가리켜 "얼마나 웅장한 사상인가!(What a magnificence of thought!)"라고 탄성을 질렀다.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이 쥐려 하지만 오히려 공허함을 안고 산다. 통장 잔고가 늘어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소셜미디어의 좋아요가 쌓여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울의 역설은 그 빈자리를 정확히 가리킨다. 참된 기쁨과 부요함은 조건이 다 갖춰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붙잡을 수 있는 내면의 실재라는 것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근심이 문을 두드릴 때, 빈손을 내려다보며 무력감을 느낄 때 - 그때가 바로 이 역설의 진실을 붙잡을 기회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가진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을 누리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으며, 비워진 손으로 오히려 더 많이 나눌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세상이 설명하지 못하는 역설의 풍요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당신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 안에서 뜻밖의 기쁨이나 위로를 경험한 적이 있나요?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나요?

2.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역설이 당신의 일상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3.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말은 오늘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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